에세이

김경중 칼럼 - 다시 푸른 하늘을 우러르자!

샤론의 꽃 2016. 8. 31. 15:56

 

 

 

“다시 푸른 하늘을 우러르자!”

 

하늘이 깊은 강물처럼 푸르르다. 하루 이틀 사이에 하늘이 저토록 맑고 푸르게 변할 수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우리가 처한 昨今의 현실에 대해 일말의 희망을 갖게 되기도 한다.

 

변할 수 있다는 게, 바뀔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인가? 물이 고이면 썩고 꽃도 피면 시들고 영원할 것 같던 인생도 사랑도 모두 덧없이 진다. 도저히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식민치하 36년도 연합군의 승리로 하루 아침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되찾았다.

 

최악의 빈곤도 서슬 시퍼렇던 군부독재도 이제는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고 대한민국은 단 기간 내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위대한 나라로 세계가 인정하고 있으니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다.

 

지금은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는 남북통일도 언젠가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분단의 장벽이 하루아침에 허물어 질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 이것이 하늘의 섭리요 역사의 흥망성쇄인 것이다.

 

오늘 우연히 그 동안 스크랩해 두었던 2년 전 어느 날 일간지에 실린 기사 하나를 보게 됐다. “안중근 의사 유묵 '敬天(경천)', 104년 만에 천주교 품에”

 

‘敬天’은 안 의사께서 1910년 3월 순국을 앞두고 중국 뤼순 감옥에서 일본간수의 부탁을 받고 쓴 마지막 친필이다. 이 유묵이 우여곡절 끝에 한 세기 만에 다시 천주교를 통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으니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감개무량(感慨無量)한 일이 아닐 수 없다.

 

‘敬天’에는 ‘하늘을 공경하여 숭배하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왜 안중근 의사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할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에 하늘을 공경하라고 하셨을까?

 

물론 세례명인 토마스(도마)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답게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담담히 자기의 본향을 향해 돌아가시겠다는 순응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 이 나라를 하루속히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망도 담겼을 것이다.

 

‘하늘 天“字에는 여러 개의 뜻이 내포 되어 있다. 자연적으로는 ’지평선이나 수평선 위로 보이는 무한대의 공간‘을 의미 하고, 종교적으로는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이 돌아가는 사후 세계‘로 정의할 수 있다.

 

또한 김지하 시인은 ‘밥이 하늘이다’라는 표현으로 농심을 천심으로 비유했다. 일본에서는 백성이라는 단어가 농부라는 단어와 일맥상통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民心은 天心“이라는 말이 있으니 하늘과 민초들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듯 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안 의사께서 쓴 '敬天'은 왜놈들에게는 “이 놈들아, 하늘 무서운 줄 알아라”는 일갈(一喝)이 될 것 같고, 조선인들에게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늘 깨어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기도하라”라는 깊은 信心으로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안 의사께서 광복 71주년을 맞는 오늘 날에 살아 계시다면 이 ‘敬天’의 뜻은 조금 달리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썩어빠진 정치인들이나 탐관오리들은 들으라! 너희들은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어떻게 찾은 나란데, 어떻게 목숨 바쳐 이룬 광복인데 너희들이 맘대로 민심을 저버리고 국정을 농단하고 있단 말이냐?”라고...

 

역사가 가르쳐 주듯이 세상에는 사람의 힘으로 될 일이 있고 하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도 있다. 따라서 정치는 ‘花無十日紅이요 權不十年’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배움삼아 하늘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민의를 살펴야 한다.

 

위정자들은 들어올 때보다 물러날 때를 먼저 지혜롭게 헤아리고 功過를 분명히 성찰하여 겸허히 역사 앞에 엎드리므로써 머문 자리가 아름다운 지도자로 기록돼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 ‘물이 반이나 남았다.’와 ‘아직 물이 반밖에 안 남았다.’는 긍정과 부정의 차이가 아니라 상황의 엄중함에 따라 사용하는 전략적 차이임을 잊지 말자.

 

(국가혁신포럼 대변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