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대중문화와 크리스천

샤론의 꽃 2008. 4. 2. 19:36

 많은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욕구를 다양하게 분석하여 말하고 있지만 이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자면 인간적 욕구와 영적인 욕구라고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적 욕구는 대부분 개인의 이기심에서 기인되는 세상적 욕구이며, 영적인 욕구는 이 세상의 행복보다는 저 세상의 삶에 먼저 소망을 두는 숭고한 종교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겠죠.

오늘 날 현대인들은 눈부신 물질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동시에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서 아낌없이 대가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상류사회의 문화들이 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대중의 욕구와 취향에 맞는 문화상품으로 개발되어 자본주의 경제발달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바야흐로 대중이 문화의 주인으로 행세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대중문화의 요소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거나 아름답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왕궁이나 귀족들의 정원에서만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섹스피어의 연극이나 모차르트, 베토벤의 공연도 이제는 대중들도 일반 극장에서 손쉽게 관람할 수 있게 되었고 중세에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읽을 수 있었던 성경이나 많은 철학서, 문학서들이 누구나 당당히 사서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급문화들이 대중적으로 전파될 수 있게 만든 일등 공신은 물론 대중매체의 발달일 것입니다. TV를 비롯한 매스미디어야 말로 대중을 각종 정보의 홍수 속에 빠뜨리게 하는 한편 스폰서인 광고주들이 자사의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도구로서 상업적인 문화를 퍼뜨리는데 앞장 서 왔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문화는 인간의 기원과 함께 태동했고, 인간 역사의 전개와 함께 발전해 왔습니다. 이처럼 문화라는 것은 한 사회에서 그 구성원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학습되고 전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업주의에 뿌리를 둔 대중문화는 돈벌이에 감각이 탁월한 문화기업가가 대중의 욕구를 잘 파악한 후, 엘리트들을 고용해서 만들어낸 조작된 문화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중문화란 매스 미디어의 발달에 힘입에 특정 기업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대중이 소비하는 문화라고 정의해도 좋을 듯 싶습니다. 이러한 대중문화는 오늘날 우리의 삶 자체를 지배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화는 이 시대에 있어서 약방의 감초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데나 갖다 붙이면 다 그럴듯한 단어가 됩니다. 문화예술은 물론이고, 종교문화, 지역문화, 도시문화, 농촌문화, 생활문화, 먹거리문화, 자동차문화, 심지어는 침실문화라는 표현까지 서슴치 않고 사용할 정도입니다.

이 시대가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히면서 많은 사람들은 삶의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소비지향적인 인간으로 변모되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물질문명에 소외되어 불행의 늪에 빠지거나 정신적인 공허함으로 시달리게 됐습니다. 상업주의와 결탁한 대중문화의 생산자들이 끊임없이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문화상품들을 마구 쏟아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창세기 1장 28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라는 문화명령의 구절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화창조자로서의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은 이제 조작되고 강요된 대중문화에 의해 올바른 가치 판단력을 상실하고 정보의 포로가 되고, TV나 인터넷의 노예가 되고, 연예인을 우상으로 삼는 등 반 문화적인 행태를 보이며 타락을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본능적 자극을 원하는 대중과 유행을 노려 더 많은 이익을 얻어보겠다는 문화기업가들의 타협으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은 이제는 경제논리보다는 오히려 문화의 논리에 더 많이 적용되고 있는 셈입니다.  즉 건전한 대중문화는 차츰 뒷전으로 밀려나고 저질적이고 때론 악의적이기까지 한 대중문화가 범람하며 여기저기 독버섯처럼 피어나고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먹을 것이 없으면 비참했는데, 이제는 문화가 없으면 비참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욕구가 가장 근본적인 생리적 욕구에서 문화적 욕구로 업그레이드 되면서 이제 빈부의 잣대는 돈이 아니라 문화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지방이 점점 더 낙후돼 가고,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도 문화의 결핍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록을 찾아보면 문화의 타락은 인간의 타락과 궤를 같이 했습니다. 고대 로마의 문화가 그러하였고, 중세 암흑기의 종교의 타락과 맞물린 문화가 또 그러하였습니다. 문화는 삶의 전반적인 양식을 포괄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타락하면 문화도 같이 타락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창세기에 기록된 아담과 하와로부터 비롯되는 인간타락의 역사 속에서 문화를 타락시키는 원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유혹 때문입니다. 국어사전에는 유혹이란 ' 꾀어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거나 좋지 않는 길로 이끄는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성경 창세기 3장을 찾아보면 유혹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리라(창 3:4-5)

원죄의 근본은 늘 아담과 하와에게로 돌아가고, 그들 뒤에는 뱀이 등장합니다. 성경 창세기 3장을 보면 뱀이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하고 하와는 다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를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아담과 하와에게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뱀은 하와를 유혹했으며, 그들은 뱀의 꾀임에 넘어가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문화가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된 원초적인 욕구 - 안식, 성의 향유, 재물, 쾌락 - 등을 매개로 인간을 유혹한다면 마약처럼 강력한 흡인력과 도저히 끊기 어려운 중독성을 갖게 됩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가치관 상실의 시대에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요즘 같이 어디를 가나 갖가지 유혹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더더욱 올바른 성경적 가치관으로 대중문화의 모습으로 다가온 사단의 유혹을 극복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시험이기도 했지만 분명히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겨라.”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처럼 사단의 유혹에 단호히 대처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건전하고 올바른 문화생활을 향유하기 위해 더 한층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거짓말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성숙되기를 원하시지만 사단은 모든 고난을 거부하고 순간적인 쾌락에 빠지라고 요구합니다. 사단의 문화가 처음에는 달콤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곧 파멸에 이르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사단의 문화에 빠져드는 것이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임니다. 사단문화의 네 가지 거짓말은 무엇인가요?

첫째,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되리라.’

둘째, ‘너희가 정녕 죽지 아니하리라.’

셋째, ‘너희가 선악을 알리라.’

넷째, ‘너희의 눈이 밝아지리라.’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뉴에이지의 기본사상이 되었습니다. 이 네 가지 거짓말의 맨 밑바닥에는 무엇이 감추어져 있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교만, 즉 모든 것이 인간의 정신 속에 잠재되어 있다는 믿음입니다. 인간의 심층을 파헤쳐 보면 인간 자신이 하나님임을 발견하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뉴에이져들은 인간의 문제는 죄가 아니라 무지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계몽을 통해서 인간은 무엇이든지 해결할 수 있으며, 인간의 창조력과 인간의 힘만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에 그들은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창3:7)”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무언가를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 같이 선악을 알고, 그들 자신이 벗은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벗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이성에 대한 새로운 눈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타락한 문화의 이면에는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본주의와 성적 문란함이 감춰져 있습니다.

특히 여성잡지의 스캔들 기사, 주간지 기사, 통속소설 등의 글을 보면 일견 시대적 상황과 문제의식, 개인이나 사회의 윤리적 문제를 파헤치는 것처럼 위장을 하지만 실상은 선정성과 말초적 본능자극의 틀에 머무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보통입니다. 리얼리티를 빙자해 추측으로 재구성하여 픽션화시키는 경우도 있고, 무조건 까발리고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이 심하게 나타날수록 작가정신은 고사하고 시대적 가치관의 빈곤만 더욱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영어: postmodernism, post- 뒤의 또는 반대의, modernism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이성보다 감성을 중시하는 하나의 사상이다. 2차 세계대전 및 여성운동, 학생운동, 흑인민권운동과 구조주의 이후에 일어난 해체현상의 영향을 받았다. 탈중심 사고, 탈이성적 사고가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으로 1960년대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리오타르, 푸코 등이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으로는 반형식, 전통적 색채의 파괴, 현실과 허구의 뒤섞임, 서술구조의 해체, 분산, 다원성, 패미니즘, 패러디와 페스티쉬(혼성모방, 짜집기), 예술장르 간의 복합성 등을 들 수 있다.

셋째는 전염성 때문입니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뱀의 간교함에 넘어간 하와의 범죄가 자연스럽게 아담에게 옮겨짐을 알 수 있습니다. 대중문화가 가지는 전염성을 모방성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겠지요. 특히 청소년들이 인기 연예인들의 말투나 행동, 의상들을 모방하는 것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요즘과 같이 매스 미디어가 발달하거나 인터넷이 급속도로 확산되는 시대에는 더욱 가속도가 붙습니다.

'버나드 쇼우'의 말처럼 유행은 인간을 꾐에 빠지게 하는 전염병입니다. 불건전한 대중문화의 유행을 타고 청소년들의 음주, 흡연, 자살, 폭력의 집단화, 음란 컴퓨터 프로그램의 확산, 포르노 영화, 도색 잡지, 음란 만화, 저질화 된 방송 프로그램 등등이 건전한 크리스천 문화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여기 오염된 대중문화의 실례를 몇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마광수, 장정일류의 소설>

오래 전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음란성과 관련돼 소설가 장정일이 구속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문학인들의 반발이 대단했습니다. 작가는 Y라는 한 여고생의 시각을 통해 성의 자유로움, 지식인의 가면, 현대 사회의 이율배반적인 모순을 나름대로 표현했음을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좋아하고, 그 치열한 작가정신이라든지 문학에 대한 작가의 순수한 열정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그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쪽이었습니다. 소설은 대부분 허구를 바탕으로 꾸며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독자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단순한 도덕적인 잣대로 평가하거나 어떠한 책임을 종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작가는 현실적 체험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그런 책임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지 않고 다시 한번 굴절시켜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작가 신경숙은 자신은 장정일의 그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으나 그 작품의 음란성과 관계없이 독자들의 평가와 자정능력을 무시한 법적 조치가 오히려 더 음란스럽다는 소감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은 보편 타당한 일반 정서로는 용납하기 힘든 음란 퇴폐물에 해당하는 3류 소설이라고 질타했으며, 법원도 ‘겉으로는 문학성을 주장하지만 속으로는 상업성을 추구하는 속 보이는 거짓말이거나 피고인의 착각’이라고 판결하고 징역 10월형을 언도하였습니다.

나중에 장정일은 보석으로 풀려 나왔지만 문학작품에 대한 음란성 시비는 청소년 보호에 대한 법적 조치가 강화되고 시민단체의 감시활동이 적극성을 띠면 띨수록 활발히 전개될 전망입니다. 아직도 많은 기행으로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마광수 교수의 작품들을 볼 때 과연 표현의 자유와 작가의 사회적 책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작가의 모든 작품이 면죄부를 인정받는 시대는 지나간 것같으며, 특히 청소년들의 정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대중문화는 어떤 경우에는 일반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해 볼 때 전문가적인 비판의식보다 대중의 상식에 근거하여 비판되어지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견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건전한 상식도 비평문화에 훌륭한 잣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영화 <래리 플린트>는 크리스천인 나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영화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영화포스터에는 주인공 <래리 플린트>가 성조기로 만든 팬티를 입고 예수님처럼 십자가형에 처해져 있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술맛을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술을 만들어 팔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챈 약삭빠른 장사꾼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그는 20년 뒤 자신이 경영하는 스트립 바를 홍보하기 위해 포르노 잡지 <허슬러>를 발간해 백만장자가 됩니다. 엄청나게 돈을 벌고 유명세를 타게 된 그는 보수주의자들의 거센 비판에 시달리게 되는 한편 마침내는 음란물 간행 죄로 고소당하게 되었고, 테러로 인해 불구자가 됩니다. 그의 동거녀가 에이즈로 죽었을 때 ‘에이즈는 신이 내린 천형’이라는 폴 웰 목사의 연설을 듣게 된 <래리 플린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복수를 결심하게 됩니다. <폴 웰>목사를 어느 광고에다 근친상간자로 묘사하여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하게 된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 사건을 대법원까지 끌고 갑니다. 미국의 헌법 수정조항 제1조가 명시하는 표현의 자유는 마침내 그를 승리로 이끕니다. <플린트>는 외칩니다. “법이 나 같은 쓰레기를 보호한다면 여러분 모두도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이 영화는 철저하게 기독교를 포함한 미국의 보수세력의 위선을 꼬집었습니다. 인간도 하나님 만큼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인간의 껍데기 같은 위선과 허울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무방비 상태로 보기엔 다소 위험한 영화이지만 <고교생 입장 가>로 상영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박중훈이 주연으로 나온 <할렐루야>라는 영화는 신문광고 카피에서 믿음, 소망, 사기라는 표현을 쓴 것처럼 시종일관 목회자를 희화화하고 기독교를 조롱하는 장면들을 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밀양>에서도 우리는 기독교를 바라보는 사회의 부정적 시각과 더불어 가장 핵심적인 기독교의 정신인 사랑과 용서라는 주제에까지 역설적 논리로 본질을 호도시키는 상황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악마주의 음반>

청소년들의 탈선을 부추기는 폭력, 음란물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악마주의 경향의 음반까지 대량으로 유통되고 있습니다. 악마주의는 죽음과 허무주의를 찬미하고 폭력이나 마약복용 등을 조장하는 사탄의 소리라는 점에서 방치할 경우 청소년들에게 미칠 해악이 클 것으로 생각됩니다.

<죽음의 흔적> <사악> 등의 디스코에 수록된 곡들도 <망치로 짓이긴 얼굴><시체의 눈으로 바라보니><출생과 함께 죽이기> 처럼 직선적으로 악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표지 또한 잔혹한 살인장면이나 피를 흘리는 시체를 보여줌으로써 폭력성과 공포심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가사 역시 난잡한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하는가 하면 악마의 부활을 경배하고 마약과 자살을 부추기는 내용들 일색입니다.

청소년들이 이런 부류의 음악에 탐닉한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지 불을 보듯 훤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성과 마약과 폭력과 죽음의 충동에 사로잡혀 악의 수렁으로 깊숙이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지난 85년 미국 LA에서 37명을 강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희대의 살인마는 음악이 암시하는 대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해서 전 세계를 경악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막상 경찰이 체포하고 보니까 아직 얼굴에는 여드름이 무성했고 부모도 인텔리 층이어서 그가 그런 끔직한 범행을 저지른 주범이라고 형사들조차 믿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혹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냐?”

형사가 의심쩍은 얼굴로 그렇게 물었더니 10대의 그 학생은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다 음악 때문이에요”하더랍니다.

“뭐, 음악?”

형사는 처음엔 그 게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록 음악을 들으면 계속해서 kill him, kill him!하고 외치거든요.....

하루에도 몇 번 씩 잠재의식 속으로 파고드는 메시지.... 사람을 미치게도 하고 두렵게도 만드는, 때로는 환각상태에 빠지게도 만드는 악마의 외침, 외침,,,,, 우리는 더 이상 대중문화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광고>

프랑스의 노장 광고인 <로베르 궤랭>은 “우리가 숨쉬고 있는 공기는 질소와 산소, 그리고 광고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 만큼 광고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회체제 속에 있음을 잘 설명한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만큼 오늘날에 대중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상호 영향력을 주고 받는 광고는 주로 개인소비생활은 물론이고 사회전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업적인 마케팅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부정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광고가 주는 해독은 참으로 심각한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먹어봤죠?”

“먹어보니 어땠어요?”

“하얀 속살이 부드럽고 고소했어요.”

“하루에 세 번도 먹어요”

“먹어보니 또 먹고 싶어”

이것은 우성식품의 <머거본>이라는 땅콩과자의 광고 카피입니다.

<마이클 더글라스>와 <샤론 스톤>이 주연한 영화 <원초적 본능>의 하이라이트를 흉내낸 것으로 모델들의 대사는 물론 일부장면의 선정성이 파격적으로 드러났던 광고입니다. 영화를 본 사람이면 알 수 있겠지만 이 광고 중 영화를 패러디한 장면에서 여주인공은 노팬티의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뇌쇄적인 몸짓으로 취조실의 남자 주인공 형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이 광고에서 나타나는 먹고 먹히는 상황도 이미 제품의 이미지를 초월하고 있는 듯이 보여집니다. 제품 이름을 너무 부각시키다 보니 브랜드 네임보다는 성행위로서의 ‘먹는 것’이 더 위력적으로 어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광고는 목표고객 설정의 잘못으로 뚜렷한 매출성과를 올리지 못한 실패한 광고가 돼버렸습니다. 이와 비슷한 유형의 광고로 <이 맥스>란 브랜드의 정유회사 광고가 있습니다. <머거본>과 마찬가지로 섹시 스타 <샤론 스톤>을 모델로 써서 인지율을 높여보려고 했으나 "강한 것으로 넣어 주세요"라는 자극적인 카피가 오히려 시청자들에게 혐오감을 줌으로써 실패한 광고로 낙인 찍히고 말았습니다.  

이 이외도 섹스를 소재로 한 많은 광고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고 나름대로 소비자들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했던 반면 시종 눈길을 끌지 못하고 소비자로부터 외면 당한 실패작들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어쨌든 이런 섹스어필 광고들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기대하는 광고전략상 표현기법으로 인해 어른보다는 청소년들에게 자칫 해악을 끼칠 우려가 큽니다. 상품 고유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불건전한 성문화까지 마다 않고 끌어들이는 광고 표현물들.... 물론 살아남기 위해 보다 강한 자극으로 소비자의 눈길을 끄는 표현전략이 필요하겠지만, 과연 요즈음 범람하는 그런 류의 광고들 중에서 진짜로 전략적으로, 필수 불가결하게,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예술과 외설의 절묘한 조화로 표현되어진 것이 몇 편이나 될지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략으로 무장된 섹스 어필광고는 소비자의 호응을 받아 살아남을 것이요, <머거본>이나 어느 정유 회사 광고처럼 엉터리 섹스어필 광고는 소비자에게 혐오감만 안겨주고 실패한 광고로 기업에게 치명적인 손실을 입히게 될 것입니다.

소비자의 시선과 주목을 끌기 위한 표현 소재로 3B라는 것이 있습니다. Baby(아기), Beast(짐승), Beauty(미인)가 그것으로 이 중 Beauty가 성 표현 광고와 연결되는 소재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 성적소구 광고는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품의 특성이나 기능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컨셉 설정에 성적 자극만 안겨주는 비주얼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더 아름답게 성을 나타내느냐 하는데 초점을 맞춰 아이디어를 짜내는 것이 아니라 성을 무기로 창의력 부족을 메우려하는 무책임한 발상은 광고주의 마케팅 실패 뿐 아니라 사회전체의 미풍양속에도 막대한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하루속히 근절돼야 마땅합니다. 외국광고 중 ‘누드’가 아니라 ‘아이디어’로 손뼉을 칠만한 멋진 섹스어필 광고 중 세  편을 소개합니다.

첫 번째는 네델란드의 <아큐브> 콘택트 렌즈 광고인데 남녀 간에 막 어떤 상황이 벌어지려는 비주얼에 “밤에 벗지 않아도 되는 오직 한 가지” 라는 헤드라인이 적혀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아이디어요, 멋진 카피가 아닙니까?

또 하나는 스페인의 유방암 방지협회 광고입니다.

탐스런 가슴과 도려낸 가슴을 대비한 사진..... 그 (도려낸 가슴) 속에 다음과 같은 카피를 써놓았습니다.

“지금 돈 좀 쓰시죠. 그래야 나중에 큰 돈이 들지 않습니다.”

즉 유방암 검사를 미리 하라는 권유를 표현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가슴을 잃게 된다면 그 땐 돈이 문제가 되지 않겠죠. 그런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이런 광고들은 누구나가 공감하는 필연적인 누드광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15살 짜리 <부룩 쉴스>를 모델로 쓴 캘빈클라인 청바지 광고입니다. "나와 캘빈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어요"라는 멋진 카피로 세계 광고사에 영원히 기억될 최고의 섹스 어필 광고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직설적이고 외설적인 섹스 어필이 아니라 아름다운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예술지향적 섹스 어필 광고만이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는 훌륭한 크리에이티브 전략이 될 수 있음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사는 집이 당신이 누구인가를 말해 줍니다"
<롯데 캐슬>이란 브랜드를 내세운 한 아파트 회사의 광고 카피입니다.
광고가 주는 사회적 해악 중 하나는 인간적 차별을 부채질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에 있어 기술의 발달로 상품의 품질적 차이를 부각시키기가 어렵워 질수록 이러한 차별은 광고의 본질적 기능인 상품 간의 차별이 아닌 상표 이미지의 차별, 그 상품을 쓰는 사용자 수준의 차별로까지 확대됩니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옷을 소유한 소비자는 그렇지 못한 소비자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주장하는 광고가 우리 청소년들의 가치관 형성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미칠지는 두 말 하면 잔소리가 될 것입니다.

<귀신 신드롬>

우리 청소년들의 정신을 병들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귀신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의 대중문화가 온통 귀신 신드롬에 휩싸이고 있는 형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방송국에서는 귀신 이야기를 전문으로 하는 프로그램들이 제작되고 있고, 영화에서도 <사랑과 영혼> <은행나무 침대>를 비롯한 귀신소재 영화들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바 있으며 <자귀모> <여고괴담> 류의 귀신 공포 영화가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귀신영화가 관객으로부터 호응을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속을 연구하는 경희대 서 정범 교수는 ‘상실의 시대가 낳은 산물’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는 현대인들의 마음속에 신, 가족적인 정서, 수평적 공간, 자연과의 일체감 등을 상실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원시에 대한 회귀를 갈구하면서 뭔가 초능력적인 힘에 기대고 신비로운 것을 찾고자 하는 욕구로 인해 이 같은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서 교수는 “자꾸만 매스컴에서 이 같은 얘기를 반복한다면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편집증 환자를 양산할 수도 있다.”라고 경고합니다. 어쨌든 귀신 신드롬이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청소년기는 아직 자기정체성과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시기입니다. 또 청소년기는 불안정한 성숙단계에 있는 주변인입니다. 그래서 일종의 반항기를 겪게 되는데 부모들이나 선생님들이 대중문화의 해로움을 경고해 주면 오히려 더 빠져들게 됩니다. 무분별한 성적 자극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호기심을 현실로 연결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각종 범죄에 연루될 위험이 매우 높습니다. 또한 세계화는 일본, 미국 등지에서 옮겨지는 저질 대중문화의 범람을 더욱 촉진시키고 있으며, 문화종속을 통해 그들의 소중한 정신마저 빼앗길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하여 고찰해 볼 때, 우리 청소년들을 대중문화의 오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시급히 실천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첫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교회를 찾아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현실적 문제점은 청년들이 자꾸 교회를 떠난다는 데 있습니다. 말씀을 잘 들어도 악한 마귀하고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힘든 세상에서 오히려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던 청년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위기 중의 위기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우리 교회가 청(소)년들의 욕구충족과는 담을 쌓고 살아가는 데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본당은 너나할 것없이 크고 화려하게 꾸미나 교육관은 낡고 비좁으며, 주차장을 만드는 일엔 거금을 쓰면서도 도서관하나 지을 엄두조차 못 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세속화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교회는 엄숙한 예배의 장소가 되어야 하고, 성령의 은사를 맛보는 기도처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항상 열려있는 영적 쉼터가 되어야 하고, 특히 청년들이 자주 찾아오고 싶은 배움터가 되어야 합니다.

청소년들이 텅 빈 교회......

젊은이들이 떠나는 교회......

교회생활에 별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 바깥 세상하고는 지나치게 다른 정서와 문화적인 환경으로 인해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수록 교회는 더욱 더 청소년들을 거리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하루 빨리 우리 교회는 젊은이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건전하면서도 재미있는 프로그램, 창의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그들을 교회로, 교회로 몰려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둘째, 문화사역 전문가를 키워야 합니다.

지금 각 교회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전도사님들의 역할은 막중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늘 피로에 지쳐있습니다. 그들이 기계가 아닌 이상 전문 사역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도록 재충전과 재교육의 기회가 수시로 주어져야 합니다. 재미와 쾌락, 오락과 흥밋거리, 숨막히는 스릴과 서스펜스, 달콤한 성적 유혹 등 하루가 다르게 확장되어 가는 세속적인 대중문화에 비해 우리 교회가 제공하는 문화 프로그램들이 초라하고 궁색해 보이는 이유는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뚜렷한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청(소)년들은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따 먹어서는 안될, 그러나 너무도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과실들이 지천에 널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세속의 문화보다 더 달콤하고 재미나고 감동적이며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크리스천 문화를 제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큰 소리로 “사탄아 물러나라!”라고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각 교회마다 그러한 문화 커뮤니케이션의 통로가 되어 줄만한 인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젊은 그들을 이해해 주고, 상담해 주고, 세상 밖에서 입은 영혼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전문적인 카운슬러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세속문화에 빠져들다가 죽음 같은 고통을 맛보고 불안에 떨고 있는 어두운 영혼을 위하여 몸 바쳐 헌신할 수 있는 유능한 전문 사역자들을 하루 빨리 키워야 합니다. 아울러 영적 지도자인 교역자와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많은 관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세상 밖으로 과감히 나가야 합니다.

청소년들은 누구보다도 강한 호기심과 풍부한 감성, 다양한 문화적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하면 비교적 쉽게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복음선교사역을 하는 데 있어서 청년층을 가리켜 황금어장이라고 부릅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 캠퍼스에서의 문화선교는 청(소)년들을 낚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됩니다. 문화선교는 그들의 예술적 감성을 충족 시켜줄 뿐 아니라 지적인 욕구도 충족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나타내는 모습은 꽤 다양하여 어떤 때는 무척 예민해야 하며, 어떤 때는 아주 강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아주 부드러운 모습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매우 지혜로워야 하며 항상 은혜와 사랑이 넘쳐나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 주님이 많은 사람들을 대할 때 한결 같이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바로 그런 자세가 우리 크리스천 모두에게 필요하며, 기독교 문화를 전파하는데는 그런 자세를 가지려는 우리 모두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2008. 진도 '씨 뮤직' 페스티발(동영상)

문화선교는 하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악한 영에 속한 타락한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퇴폐적이고 감각적이며 파괴적인 문화에 사로잡힌 어두운 심령들에게 순간의 쾌락이 아닌 영원한 생명, 완전한 기쁨, 변함없는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 중심의 문화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하루속히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초대해야 하겠습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사랑의 기술>로 유명한 '에릭 프롬'은 저질 대중문화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 이렇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하잘 것 없는 3류 영화를 보거나 저질 도색잡지를 보거나 해서 따분함을 내쫓았을 때 종종 느끼는 허망한 기분, 그것은 자신의 시간을 유효하게 쓴 것이 아니라 헛되게 낭비했을 때 찾아오는 음주 후 숙취와 같은 기분이다."

참으로 인간의 행복은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에 있음을 깨닫게 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좇아 차원 높은 영적 욕구 충족시킬 수 있는 믿음생활에 더 한층 박차를 가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