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김경중 시인의 일상과 일탈 - 밥 이야기

샤론의 꽃 2015. 10. 3. 14:19

 

"밥값은 하셨는가?"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라는 질문은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라는 질문처럼 愚問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곰곰이 씹어보면 이 질문의 맛이 남다르다.

밥의 소중함도 모른 채 단순히 살기 위해 먹는다거나 단지 생리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의미와 목적을 상실 한 채 동물처럼 살아 간다는 것 모두 별로 마뜩치 않기 때문이다.

밥의 종류는 다양하다. 보리밥, 오곡밥, 콩나물밥, 곤드레나물밥, 굴밥, 송이밥, 돼지국밥, 비빔밥, 회덮밥, 볶음밥, 김밥. 콩밥도 있고, 헛제삿밥도 있고, 사잣밥도 있다. 그 중에서도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하얀 이팝이 으뜸이다.

지금은 건강을 위해 잡곡밥이나 현미밥이 대세지만 옛날에는 명절 때나 맘껏 먹을 수 있는 백미가 최고였다. 지금도 쌀의 고장 여주, 이천에 가면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하얀 쌀밥집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국, 반찬이 오르지만 주식은 밥이다. 오래 전에 경상도 상주에 볼일이 있어 다녀오다가 몹시 시장끼를 느꼈지만 꾹 참고 이천까지 와서 저녁을 먹은 적도 있었다.  몇 번 씹지 않아도 입에서 살살 녹는 그 오묘한 맛에 반해 이천 쌀밥집까지 한걸음에 내달려 온 것이다.

한 번은 그 근처의 어느 허름한 밥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메뉴판 아래에 서툰 글씨로 문구 하나가 적혀 있었다. “밥값은 하셨는가?” 격에 어울리지는 않지만 예사롭지도 않은 문구에 순간 마음이 꽂혔다.

저게 무슨 소리냐고 눈을 껌뻑이고 있었더니, 스님들 법문을 모은 책 제목이란다. “밥값 했는가”가 원래 표기인데, 점잖게 존칭을 붙였다고 웃는다. ‘밥값 하다’에는 다의적 뜻이 내포되어 있다. 밥값을 벌었는가? 사람 구실을 했는가? 삼시 세끼 밥 차려 먹고 다닐 자격은 있는가? 경제적 의미에서 철학적 의미로 확장되어 버린 이 말을 스님들은 화두로 붙잡고 있었다니 그 겸허함에 머리가 숙여질 뿐이었다.

내가 먹은 밥값은 얼마나 될까? 단순하게 65년 삼시세끼 5000원씩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65년×365일×3끼×5000원=? 무려 3억 5000만 원이 넘는다. 마음이 무겁다. 김지하 시인의 말대로 밥은 하늘이요 생명이라 했는데 먹은 밥값도 못하고 배설물처럼 살면 안 될 것 같아 잠시 마음이 무거워진 것이다. 쌀 米자를 보더라도 농민들의 손길이 88번이나 다아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 차릴 수 있다.

요즘은 "진지 잡수셨습니까?"란 인삿말을 별로 들을 기회가 없지만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아침인사가 바로 이것이었으니 격세지감이 크게 느껴진다.

집이나 음식점 뿐만 아니라 마트에서도 밥은 쉽게 살 수 있다. 도처에 밥은 넘쳐 나는데 나는 삼시세끼 꼬박 챙겨 먹으면서도 하늘이 주신 밥을, 농민들의 피땀이 맺힌 밥을 먹고도 온전히 사람구실은 제대로 하고 다니지는지 나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도 잔반 처리문제로 봉사자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점점 돼지를 키우는 농장에서도 잔반 수거를 기피한다고 한다. 번거로움도 한 원인이 되겠지만 각종 전염병에 대한 우려가 크기 때문이리라.

밥 한 톨이라도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밥 한 톨 한 톨이 지구촌의 어딘가에서는 굶주림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농부들에게 감사의 食기도를 드리는 것만도 밥의 소중힘을 깨닫게 하고 탐식을 절제하여 식량의 낭비를 줄이는 가장 겸허하고 올바른 방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