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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김경중 장로의 믿음의 오솔길에서(9) - 어느 도둑이야기

 

 

 

어느 도둑이야기

 

영국 컴브리아 주 '트라우트벡' 강가 주변에서 목장을 운영하고 있는 ‘핍 심슨'은 지난 4년간 무려 삼백 마리에 달하는 양을 도둑맞았습니다.

 

더 이상 이 사태를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심슨은 결국 과감한 조치를 내리게 됩니다. 바로 남아있는 양 팔백 마리를 모두 '오렌지빛'으로 염색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이제 ‘오렌지빛’ 양들은 누가 봐도 심슨의 소유임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됐습니다. 그는 "도둑으로부터 양을 보호할 유일한 해결책은 이것뿐이었다"며 "이제 멀리서도 쉽게 우리 목장의 양들을 발견할 수 있어 기쁘다"라고 말했답니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도둑이야기는 유난히 재미있습니다. 특히 홍길동, 일지매, 장길산, 임꺽정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의적이라든지 '괴도 루팡' 같은 멋진 도둑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언제 보아도 흥미진진합니다.

 

요즘 언론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강도살인범 같은 흉악범들하고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대도(大盜)들이지요. 도둑은 도둑일 뿐인데 세상에 큰 도둑과 작은 도둑, 선한 도둑과 악한 도둑이 있다는 자체가 아이러니컬하게 느껴지지만 나는 한때 극도로 증오할 수밖에 없었던 어느 정체불명의 도둑 때문에 피해자가 아닌 나 또한 한참을 도둑맞은 자의 심정으로 산 적이 있었습니다.

 

학교라는 공동체는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볼 때는 그야말로 전도하기 딱 좋은 황금어장입니다. 어떤 계기를 통해 성령 충만함을 받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로 결심한 후부터 캠퍼스 전도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지요. 기독교동아리를 만들어 학생들과 함께 큐티를 하고, 인근 교회 목사님을 초청하여 예배도 드리는 등 뜨거운 열정으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기대 만큼의 전도 폭발은 없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전도의 열매들이 맺혀지는 걸 보며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새내기 신입생 중 나를 가장 많이 따르던 지방 학생 한 명에게 타깃 전도를 열심히 했는데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학생의 마음문을 여시어 서서히 복음이 들어가게 해주셨습니다.

 

 

동아리 모임에 가끔씩 얼굴을 내밀던 그가 어느날 불쑥  내 방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더니 “교수님, 저 교회 나가요.”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저 놀랍고 감사한 마음에 “그래, 잘 됐구나, 축하해!”라고 말하며 그의 손을 덥썩 잡아 주었지요. “그런데 어느 교횐데?" "네, 신촌에 있는 OO교회예요”

 

그 교회는 장로교단으로 역사가 제법 오래된 교회였습니다. 그 후 그는 내 방에 종종 찾아와서 교회생활에 대해 이야기도 해주고 급기야 청년부에서 전도부원으로 노방전도를 다닌다며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완강히 복음을 거부하던 그가 저렇게 변화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두어 달이 다 되갈 무렵 그가 오랜만에 나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몹시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OO야, 너 왜 그래?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그는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더니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교수님, 저 이제 교회 안 다닐래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왜? 교회가 마음에 안 드니?”라고 물었습니다. “교수님, 저 그 교회에서 제 전 재산인 노트북 도둑맞았어요. 다시는 교회 같은 데 안 나갈 거예요”

 

나는 갑자가 숨이 탁 막혀 오면서 잠시 말문을 잊었습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후 나는 그를 소파에 앉혀놓고 자조지종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사연은 간단했습니다.

 

지방에서 상경하여 열심히 돈을 모아 산 노트북으로 전도지를 만들다가 잠시 자리를 빈 사이 노트북이 깜쪽 같이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된 시절엔 노트북은 가난한 학생으로서는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내가 전하는 위로의 말을 묵묵히 듣더니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그 이후로 그 학생은 한 번도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얼마 후 휴학계를 내고 군입대를 했다는 소식만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일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오고 슬며시 맥이 풀립니다. 사건의 본말과 진실을 정확히 가릴 수는 없고, 그 학생의 노트북을 훔쳐간 도둑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 도둑에게 나름대로 세상에서 가장 나쁜 도둑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도둑은 단순히 노트북을 훔쳐간 좀도둑이 아니라 한 청년의 연약한 믿음을 송두리째 도둑질한 잘못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 학생의 이름조차 가물가물해진 지금으로서는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간에 빨리 상처를 회복하고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도할 따름입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 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누가복음 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