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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김경중 장로의 믿음의 오솔길에서(1) - 아름다운 소멸

 

 

아름다운 소멸

 

많이 깎아 써서 손에 쥘 수 없을 정도로 길이가 짧아진 몽당연필-

 

지금 시절 같으면 벌써 쓰레기통에나 던져졌을 그런 볼품없는 물건이 내 추억의 보물창고 속엔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어린시절 절약이 습관처럼 몸에 배셨던 어머니는 몽당연필 하나라도 허투루 버리시는 일이 없이 늘 낡은 볼펜깍지에 끼워 양철필통 속에 넣어두곤 하셨지요. 나는 엄마의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흐린 연필심에 침을 발라 가면서 연필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열심히 사용했습니다.

 

대학에 가서 밥이 안 되는 문학을 공부하던 나는 몽당연필에 대한 새로운 추억거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존경하는 스승이신 박목월 선생님의 몽당연필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자주 목격했기 때문이지요.

 

"자신이 쓴 시는 스스로 지울 수 있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계셨던 시인은 늘 허름한 양복주머니 속에 몽당연필 한 자루와 조그만 지우개 하나를 넣고 다니셨습니다. 지우기 위해 시를 쓰신다는 말씀에 다소 생뚱맞다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시인은 역설적으로 평생 수 백편의 주옥 같은 시를 몽당연필로 남기셨습니다.

 

몽당연필에 관한 질긴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아내가 읽고 있던 '생명의 삶'이란 책갈피에 꽂힌 모나미 볼펜깍지에 끼워져 있는 한 자루의 몽당연필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오랜만에 참으로 신선하고 소박한 감동으로 잠시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마음 한 조각에 작은 생각 하나가 구름처럼 떠올랐습니다.

 

절약이란 단순히 아껴 쓰는 것을 넘어 누군가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주는 것이라는 것을...

진정한 행복은 무엇을 얼마나 가졌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몽당연필처럼 주어진 소명을 다하고 소멸하는 데 있다는 것을...

 

연약하고 부족한 나이지만 하나님 손에 쥐어져 다 닳도록 쓰임받다 주님 부르시는 날 후회없이 떠나가는 참으로 아름다운 소멸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마태복음 2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