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가을이면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래된 편지처럼
나만이 아는 은밀한 곳에
가만히 숨어있다가
켜켜이 묵은 먼지를 털고
뾰족이 얼굴을 내미는
그리운 사람이 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 듯
오색 단풍잎도 가을이면
한목숨 버리고 떠나지만
층층히 쌓여있는 추억의 편린들은
내 가슴속에서 다시
찬연히 피어납니다
가을에 문득 생각나는 사람은
꽃같은 얼굴의 사람이 아니라
꽃다운 마음의 사람입니다
가을이면 살포시 보고픈 사람은
함께 꽃길을 걷던 사람이 아니라
낙엽이 지는 가을숲에서
하염없이 나를 기다려주던
빈 의자 같은 사람입니다
이 가을,
나도 누군가의
빛바랜 편지이고 싶습니다
이 가을,
나도 누군가의
묵묵한 기다림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