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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김경중 장로의 믿음의 오솔길에서(10) - 일본에서 만난 천사들

 

일본에서 만난 천사들

 

지금으로부터 약 3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일본에 유학 중인 후배가 살고 있는 혼슈 북부 센다이에 가기 위해 도쿄역에서 티켓팅을 하였습니다. 도쿄역은 그 때나 지금이나 각종 철도망이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돼 있는 세계 최대규모의 철도역입니다.

 

도쿄역에서 직통으로 약 1시간 30분 소요되는 센다이행 신칸센은 처음 타보는 고속철도 답게 빠르고 쾌적했으며 창밖에 펼쳐지는 풍경 또한 매우 이국적이고 아름다웠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느라 한참 정신이 팔려 있던 차에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기 위해 양복 안주머니를 뒤지던 나는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지갑엔 적지 않은 엔화와 신분증, 비행기표가 들어있었는데 감쪽 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마도 티켓팅을 한 후 창구 앞  난간에 놓고 온 것 같았습니다. 설레이고 행복했던 마음이 갑자기 불편해지고 창밖에 펼쳐지는 풍광도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기차는 센다이역 플랫폼에 도착했고 미리 나와 기다리던 후배가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생각 밖으로 얼굴이 어두운 나를 보자 후배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형,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어요?”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어차피 알려야 할 것이기에 “야, 지갑이 없어졌어. 어디다 흘렸나봐.”라고 말하자 후배는 우선 가면서 얘기하자며 대기 중인 차로 내 팔을 잡아끌었습니다.

 

나는 차 안에서 후배에게 “아마 도쿄역 표 사는 창구에 놓고 온 거 같아.”라고 하며 '찾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생활에 익숙해진 후배는 “일본은 한국하고 달라 어쩌면 찾을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데 누가 주워도 벌써 주워갔지"라며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후배를 쳐다보았습니다. ”일단 숙소로 가서 제가 도쿄역에다 연락해 볼게 너무 걱정 말아요”라며 후배는 착 가라앉은 내 기분을 한껏 북돋아 주었습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후배는 능숙한 일본어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처음에 약간 긴장돼 있던 후배의 얼굴이 차츰 환하게 밝아오자 나는 웬지 꼬였던 실타래가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후배는 전화를 끊고 나서 “형, 어떤 사람이 형 지갑 주워 역무실에 맡겨놨데요. 이젠 걱정 말고 편히 쉬다가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때 내가 크리스천이었다면 무릎을 꿇고 감사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중요한 물품을 되찾은 기쁨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인간의 선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배의 헌신적인 배려로 2박 3일의 센다이 여정을 즐겁게 마치고 도쿄역에 들러 역무실을 찾아갔습니다. 서툰 일본말이지만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역무원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내 분실물을 보관창고에서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또 상상하지 못한 광경이 내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지갑 안에 있던 모든 물건을 종류대로 분류하여 비닐 포장지에 싸서 보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폐도 100엔짜리는 100엔짜리 대로, 1000엔짜리는 1000엔짜리 대로 각각 모아놓은 걸 보니 다시 한 번 새록새록 감동이 밀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몇 번 “아리가도고자이마스”를 외치며 황급히 역을 빠져 나와 무사히 비행기 트랙을 오른 나는 돌아오는 내내 일본인들의 도덕성과 윤리의식에 대해 마음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요즘 ‘군함도’라는 영화가 개봉 첫날부터 1000만 관객을 향해 질주한다고 합니다. 나는 그 영화를 반드시 볼 것이고 또 다시 일본인들의 악랄한 만행에 분노를 금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서는 그 동안 일본을 여러 차례 오가며 만났던 친절하고 정직하고 예의바른 일본인들의 모습도 생각날 것입니다. '국화와 칼'로 상징되는 일본문화의 이중성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보여준 후의와 진정성 만큼은 진심으로 존중해 주고 싶습니다.

 

한때 일본 선교의 비전을 품고 있었던 나는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들에 대한 긍휼함에 앞서 그들이 보여준 인간미와 책임감, 그리고 투철한 직업정신에 먼저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적어도 나와 친분을 맺어왔던 일본의 지인들은 인격적으로 나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이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돼라'는 선현들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보다 성숙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견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뉘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편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