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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시100선

김경중 시인의 아름다운 시 100선(63) - 희생양

희생양

하루에 한 번 쯤
몰래 만나 포옹하고

한 주에 한 번 쯤
몰래 만나 입 맞추고

한 달에 한 번 쯤
몰래 만나 뜨겁게 죄를 짓던 우리

어느 날 아침 불쑥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치뜨며 말했다

"우리 이제 없었던 일로 해요"

그녀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뒤도 돌아 보지 않은 채
휑 하니 사라져버렸다

원, 세상에...
神이 아닌 이상 무슨 재주로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통째로 무를 수 있단 말인가

너와 내가 저지른 숱한 죄들을
없었던 일로 단번에 날려버리기엔
우리의 비밀을 알고 있는
새앙쥐들이 너무 많아

그러나, 있었던 일을 있었던 일로
솔직히 까발린다면

우리는 너무나 부끄러워
둘 다 혀를 깨물고 죽고 말거야

그래서, 우리 같은 어둠의 자식들에겐
대신 죄 값을 치르고
착하게 죽어줄 흠없는 어린 양이 필요한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