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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야 熱帶夜 오늘밤 찻물이 끓듯 나를 펄펄 끓게 하는 것은 肉身의 불이 아니다 面壁을 하며 무릎 꿇은 가난한 마음 속에 炯炯히 타오르는 성령의 불꽃 그 서늘한 光輝 祝盃를 들고 충만한 가슴으로 노래하며 身熱을 앓는 이 밤 기름부으신 자의 특별한 恩寵만이 가득 차고 넘쳐 하늘불 활활 타는 깊고도 아득한 밤 아, 기쁘고 황홀하여라 거룩한 빛 서늘한 긴긴 축제의 밤이여! 더보기
그물 그물 해어진 그물코를 꿰매며 아이들이 바람을 데리고 놀고 있다 아버지는 밧줄처럼 굵은 팔뚝을 걷어올리고 깊은 곳에다 그물을 던지신다 무수히 많은 조개껍질들이 산산히 부서진 채 물거품에 휩쓸려다니고 있고 아버지는 잠못 이루며 뒤척이는 바닷속에 엄숙한 몸짓으로 그물을 던지신다 날선 검처럼 울어대는 미친 칼바람소리에 어부들은 두려워 떨고 있지만 강하고 담대하라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빈 그물은 오늘도 거침없이 깊은 바닷속으로 강인하게 침몰하고 있다 더보기
김경중 시인의 아름다운 시 100선(21) - 북한강을 지나며 북한강을 지나며 눈 깜짝할 사이 가을이 왔어요 사람들은 가을 햇살의 환한 통로를 지나가고 있어요 눈 깜짝할 사이 가을이 가고 있어요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강으로 난 갈대숲을 헤치며 걸어가고 있어요 유리창 밖으로 가을비가 내리고 있어요 기을빗속에 젖고 있는 가을나무 한 그루처럼, 가을빗속에 젖고 있는 가을 산의 시린 어깨처럼 가을빗속에 젖고 있는 물총새의 흰 날개처럼 내 사랑도 오오랜 그리움에 젖고 있어요 차창 밖에서 미친 바람이 빈 손을 흔들며 웃고 있었요 머리 푼 강 안개가 흐리게 죽어가고 있어요 더보기
안개에 젖다 안개에 젖다 새벽 4시 춘천엔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날기는커녕 울지도 않는다 우는 것들이 없는 세상은 적막한 무덤이다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나무들만 우두커니 갇혀 서 있다 나무도 적당히 젖어야 다시 푸르게 필 수 있는 법 새도 적당히 울어야 다시 날개를 펼 수 있는 법 이 새벽 너무 깊이 젖어버린 가슴 때문에 날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흰 가슴 도요새 한 마리만 누군가에게 길을 묻고 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