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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시100선

燈 퇴근 무렵 안과에 갔다 의사가 어디가 불편하냐고 물었다 나는 눈 앞이 흐리다고 말했다 의사도 흐릿한 눈으로 웃으며 오늘 저녁 춘천에 안개주의보가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몇 분 동안 빛을 쏘아 내 눈 속에 묻어 있는 축축한 습기들을 말려주었다 안대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가을바람이 스산히 불고 있었다 낡은 바바리코트 깃을 여미고 저녁미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차갑게 울려퍼지는 스무숲 성당길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길가에 서 있던 가로등 하나, 레이저 같은 빛줄기를 쏴 대며 낙엽의 젖은 몸을 따뜻하게 말려주고 있었다 더보기
歸天 歸天 친구의 병문안을 갔다 구름다리 너머 하늘 맞닿은 곳에 하얀색 病棟이 보였다 암센터 8001호 5인실 병실엔 네 명의 환자만이 반달 같은 얼굴로 우두커니 누워 있었다 방 안에는 푸르스름한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고 친구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대답이 없다 花甁에 꽂혀있는 노오란 국화꽃 한 송이만 처연한 모습으로 창 밖의 빈 하늘을 우두커니 내다보고 있었다 더보기
김경중 시인의 아름다운 시 100선(17) - 비와 빗금 비와 빗금 빗금을 그으며 비가 내리고 있네요 누군가 2악장의 악보를 펴고 피아노를 치고 있네요 비에 젖은 희고 마른 자작나무 한 그루 피아노시모로 푸른 잎새 한 잎 떨구고 있네요 휘파람새 한 마리 오선지 위 음표 하나 입에 물고 빗속으로 날아가고 있네요 더보기
김경중 시인의 아름다운 시 100선(46) - 자전거 타는 아이들 자전거 타는 아이들 아이들 몇몇 살부러진 자전거를 타고 뚝방길을 달리고 있다 똑, 똑, 똑. 실로폰 소리로 떨어지는 마알 간 빗 방 울 더보기
김경중 시인의 아름다운 시 100선(45) - 가을 밤비 가을 밤비 사라진 귀뚜라미 울음처럼 자륵자륵 가을 밤비가 내리고 있네요 썩은 나무등걸에 앉아 있는 날다람쥐처럼 살금살금 가을 밤비가 내리고 있네요 유년의 기억 속 유리구슬이 담겨 있는 신발주머니를 적시며 자금자금 가을 밤비가 내리고 있네요 누가 보았을까 별들이 감추어진 하늘 끝의 푸른 새벽 누가 보았을까 흘러가는 구름속 초승달의 하얀 눈썹 자륵자륵 살금살금 자금자금 가을 밤비가 꿈결처럼 내리고 있네요 더보기
상수리나무 아래서 상수리나무 아래서 기억상실증에 걸려있던 아버지는 늘 빈 사발처럼 허전한 몸짓으로 대문 밖 상수리나무 밑에 앉아 계셨다 나는 아버지가 무슨 힘으로 그토록 오랫동안 禁食하며 버틸 수 있었을까 알 길이 없다 다만 흐린 눈빛 속에 아롱지는 아버지의 따뜻한 눈물 몇 방울을 바라보며 삶의 終止符를 찍는다는 것이 비에 젖은 雨衣를 벗듯 그렇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민큼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늦은 저녁 홀로 상수리나무 밑에 앉아 가을바람에 후드득 떨어지는 상수리 몇 알을 바라보니 그 옛날 날다람쥐 같은 우리들에게 맛있는 먹이를 주었던 도토리 같이 싱싱한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난다 저녁이면 으깨지고 부서진 몸으로 우리들 밥상에 올라오던 도토리묵 같이 물컹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더보기
밥 후회 없이 살고 싶거든 밥 앞에 공손하라 복 받으며 살고 싶거든 밥 앞에 무릎 꿇어라 밥은 하늘이다 밥은 생명이다 밥은 사랑이다 밥을 탐하지 마라 쓸데없이 축낸 밥 한 숟갈은 소말리아 어린이의 가여운 목숨 하나, 목숨꽃 함부로 떨구지 마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한 톨 한 톨 온 몸으로 받아 먹어라 무릎 꿇고 천천히 말씀으로 받아 먹어라 밥은 생명이니, 네 가난한 이웃의 딘 하나 뿐인 목숨이니 밥을 탐하지 마라 밥 때문에 결코 죄 짓지 마라 -기아체험 걷기 대회를 마치고- 더보기
김경중 시인의 아름다운 시 100선(18) - 과꽃 과꽃 시골길 한구석에 과꽃 한 그루 어느 날 옮겨져 아파트 화단으로 이사왔다 아주 촌스럽게 핀 과꽃 옆에 햇살에 잘 달궈진 돌멩이 하나 놓아둘까 지날 때마다 긴 허리가 안쓰러운 과꽃 한 송이 누군가 놓고 간 냇가의 조약돌 몇 개 더보기
김경중 시인의 아름다운 시 모음 - 받아 쓰기 받아 쓰기 국어시간 받아 쓰기를 했다 선생님께서 읽어주신 문장을 공책에다 또박또박 받아 적었다 한자도 틀리지 않게 정성껏 예쁜 글씨로 써 내려갔다 채점표는 100점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예배시간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마음판에 대충대충 흘려 적었다 얼마나 틀린지도 모른 채 삐툰 글씨로 써 내려갔다 채점표엔 몇 점이나 나올까 불안하기 짝이 없다 더보기
오직 예수 오직 예수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눈 있는 자는 볼찌어다 입 있는 자는 전할찌어다 오직 예수의 말씀을 오직 예수의 능력을 오직 예수의 사랑을 더보기